삼별초 일지-제12회

현장송 | 기사입력 2021/07/21 [20:16]

삼별초 일지-제12회

현장송 | 입력 : 2021/07/21 [20:16]

▲ 저자 현장송 기자

 

아침 해가 수평선에서 두어 발 떠오를 무렵, 배중손 교위가 연단에 올랐다. 무겁고 침통한 분위기가 섬을 뒤덮었다.

 

저는 대장군 노영희(盧永禧) 대장군의 지휘권을 인수받은 교위 배중손입니다. 이 엄중한 시기에 저는 할아버지 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지금부터 94(1176)년 전에 충청도 공주 명학소에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들과 똑같은 노비 신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비라고 해서, 종의 신분이라고 해서 사람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종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망이도 망소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노예들은 자기가 노예라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노예가 되는 것이고, 종이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종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외치며 잠시 숨을 골랐다.

 

이어 지금 고려는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개경에 들어가려 합니다. 스스로 몽골의 종으로 무식한 몽골 놈들의 노예로 자처하려고 합니다.

 

나라 전체가 노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나라는 이제까지 우리가 지켜왔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압박하고 종으로, 핍박하고 군림하면서 노예로 취급했을 뿐, 우리를 나라의 주인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라고 크게 외쳤다.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배중손은 지금 나라는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망이와 망소이는 자기가 노비가 아니고 종이 아님을 선포하기 위하여 동료들을 모았고 그들과 함께 귀족들의 폭거에 항거하였습니다.

 

망이는 스스로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가 되어 관아를 점거하고 동지들을 결속하여 세를 넓혀갔습니다.

 

임금은 정황재(丁黃載)와 장박인(張博仁)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무력으로 진압하려했지만 망이와 망소이 군사에게 크게 패하고 예산현(禮山縣)까지 빼앗겼습니다.

 

망이와 망소이는 노비를 노비로 보지 않았고, 종을 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살리는, 나라의 주인으로 보았습니다. 망이(亡伊)의 세는 점점 불어나 공주에서 충주까지 점령한 일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망이와 망소이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달래고 회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의 주인들은 망이와 망소이를 따라갔던 종들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 둘씩 죽이고 가두었습니다.

 

망이와 망소이는 다시 일어나 가야사를 점령하였고, 다음해(1177) 3월에 홍경원을 불태우고 개경까지 진격할 기세였습니다.

 

이들은 아주(牙州:牙山)를 함락시키고 청주목(淸州牧)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습니다. 그해 7월 망이와 망소이가 그래도 나라가 있어야 한다며 스스로 항복하여 청주 옥사에 갇힘으로서 사태가 수습됐지만 이 땅에 노비제도가 남아있는 한 우리는 조정과 싸워야 하고 제도와 싸워야 합니다. 때문에 권력자들과 협력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삼별초가 다스리는 나라는 노비도 없고 종도 없습니다. 모두가 이 땅의 주인이고 하늘 자손입니다. 모두가 같은 사람 일 뿐입니다. 그래서 노비문서를 빼앗았습니다.

 

지금 고려 인구는 210만 명입니다. 그중 노비는 80만 명이나 됩니다. 노비는 주인 마음대로 돈에 팔리기도 하지만 물건과 바뀌기도 합니다. 사람 하나의 값이 어찌 말 한 필과 같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고려의 새 역사를 시작하는 오늘! 여러분 손으로 고려의 노비 문서를 불로 태우시오! 그리고 하늘로 날리시오!”라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모여 있던 군중들은 만세! 배중손 장군 만세!”를 외치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배중손은 그렇게 장군이 되고 삼별초의 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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